아웅산 수치 여사는 1988년 갑자기 등장해 민주화운동을 이끈 미얀마의 대표적인 야당 지도자다.
그녀는 한결같이 인권과 자유, 경제발전을 위해 민중 앞에 섰고 , 미얀마 민중 들은 압도적인 지지로
그녀를 따랐다 이런 그녀를 미얀마 군부정권에서 그냥 놔둘 리 없다.
그녀 인생의 절반 가깝게 가택연금을 당했다.
2007년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위대가 가택연금 중이던 아웅산 수치 여사를 찾아가 15분간 눈물의 만남을 하기도 했다.
그럼 아웅산 수치 여사는 누구인가? 그녀는 버마의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로 양곤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10대 시절에는 인도로 건너가 고교생활을 한 다음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과 정치학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1985년에는 일본의 교토대학과 1987년 인도 대학에서는 특별연구원을 지내기도 하였고 런던에서는 동양학과 아프리카학을 공부하기도 한 엘리트이다.
그러던 중 1988년 4월경 모친의 병을 계기로 귀국했던 그녀는 뜻하지 않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민족의 영웅으로 잘 알려진 그의 아버지 아웅산의 딸인 아웅산 수치의 귀국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군부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지도자로 나서 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락을 하지 않다가 1988년 9월 18일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가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자 마침내 그녀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서서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열정적인 활동을 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얀마 민주주의 상징이 되었다.
1990년 5월의 다당제 총선을 통해 아웅산 수치가 이끈 민족민주동맹이 압승을 했지만, 이전에는 8888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바 있는 군부정권은 투표 결과를 무효화시키고 그녀를 가택연금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러한 수치 여사의 민주화 투쟁은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까지 이어지기도 했으나, 가택연금 상태이므로 아들이 대신 수상을 하기도 했다.
1995년 다행히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이 풀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옥스퍼드대학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남편이 암으로 죽게 되었는데도, 그의 장례식에 가게 되면 미얀마로 다시 돌아올 수가 없을 거 같아, 남편의 곁에서 임종도 지키지도 못하고 홀로 자택에서 그 슬픔을 삭혀야 했다고 한다.
그 후로도 몇 번의 가택연금을 더 당한 아웅산 수치 여사는, 드디어 2010년 12월경에 총선에서 민족민주연매동맹이 압승하는 쾌거로 인해 가택연금에서도 풀려나게 되었다.
그후에도 그녀가 속한 민족민주동맹은 국회의원보궐선거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로 승승장구를 이어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아웅산 수치는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몇개의 나라를 돌며 민주화투쟁에 대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광주도 방문해서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하는 등 우리나라에서도 아웅산수치여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웅상 수치여사는 오래되지 않아 광주 명예시민증을 박탈당하고 만다.
그 이유는 민주화에서는 틀림없는 위대한 투쟁가, 지도자이지만, 미얀마에 속해있던 한 소수민족 로힝야족의 학살을 방조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미얀마는 특수한 정권 형태를 가진 국가이다.
다시 말해 대통령이나 총리가 군부에 명령권을 발동할 수 없는, 정권의 기득권 세력이 군부세력이다.
그러니 기득권 세력에 반항하는 기미만 보인다면 언제든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렇듯 막강한 군부 권력으로 정치적 불안과 쿠데타가 계속 상존해왔던 탓에 아웅산 수치 여사도 소수민족에 대한 군부의 탄압을 어찌할 수 없이 방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도 항변을 하기도 했지만, 많은 나라들의 실망을 어쩔 수 없었다.
결과는 거센 반발로 끝이 났고 우리에게 아웅산 수치는 잊히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20년, 작년에 미얀마에서는 총선이 열리고 민족민주동맹이 완승을 하였으나, 이를 군부에서 또 거부하고 나서게 된다.
대통령과 선관위원장의 자격을 박탈하고 선거의 무효를 주장, 쿠데타를 일으킬 분위기를 조성해갔다.
미얀마 국민들과 국제사회에서 유감을 표명하는 등 쿠데타 저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얼마 전 2021.2.1 아웅산 수치 여사는 또 가택 연금되었고, 다시 쿠데타는 시작이 되었다.
여전히 군부의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민중의 상징적 지도자는 아웅산 수치 여사인 것이다.
연일 뉴스에서 미얀마에서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앞다투어 나오고 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건 비단 나만의 마음이 아닐 터...
과거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아픈 민주화의 시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디 미얀마도 이러한 고통을 하루빨리 끝내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어 미얀마의 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펼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손 보험 너무 올랐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0) | 2021.03.15 |
---|---|
나만 모르는,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뜻밖의 원인! (0) | 2021.03.14 |
은하철도999 원작자 미야자와 겐지 (0) | 2021.03.11 |
캠핑, 차박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용품 21가지 (0) | 2021.03.09 |
온천이 얼마나 좋길래 일본에서는 원숭이도 온천욕을? (0) | 2021.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