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종교
교토에 가면 절이나 신사가 참 많이 있다.
2015년 일본정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신사를 기반으로 하는 신토라는 종교의 신자는 9,126만명, 불교 신자 8,690만명 기독교 신자는 294만명, 그 밖의 종교 신자는 900만명이라고 한다.
신자수를 다 합해 보면 1억 9천만명인데, 일본인구가 1억 2천만명 밖에 안되니 일본사람 1인당 종교수가 한개가 넘는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개개인한테 물어 본 게 아니고 종교 단체에서 제출한 신자수이다.
이 통계를 보면 일본인 대부분이 신토와 불교를 믿고 있고 기독교 신자가 약 2%정도 차지하는것을 알수 있다.
하지만 섣불리 종교를 믿는 일본인들이 많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개개인한테 물어본 결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겨우 25%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일본인은 무종교인의 수가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일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에 가봐서 다들 알겠지만, 일본에는 절이나 신사가 엄청 많아서 도시곳곳에서 마주치는 경우가 많다.
일본 전역으로 치면 절과 신사를 합쳐 약 8만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따라서 당연히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는건 당연지사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착각을 바로 잡아 올 필요가 있다.
이렇듯 많은 절과 신사들은 종교적인 기능이 아닌 관습, 민속적 기능으로의 역할을 유지한 것 뿐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면 일본일들은 정월 초 하루가 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이나 신사를 찾아가서 한해의 건강과 재수를 빌곤 한다.
또 아이가 태어나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신사를 가서 신께 축복을 받고 또한 결혼식은 교회에서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죽으면 장례는 거의 다 절에서 주관하고 있느것이 현실이다.
이는 전혀 자기의 종교와는 무관하게 자연스러운 행동인것이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이나 전해 내려온.
이렇게 보면 우리나의 설이나 추석명절에 조상의 묘에 참배 가는것 같은 관습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단체에서 이야기하는 신자 수는 그런 민속이나 관습적인 행사 때 오는 참배객들까지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개개인 일본인들은 신토나 불교나 기독교를 종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까?
그것은 각각의 종교가 겪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일본은 신토와 불교가 공존하는 사회다.
신토는 토속신앙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한 종교로 신토의 신을 모시는 사당을 신사라고 부르고 그런 신들이 일본에는 8백만이 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자연의 모든 것은 신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사적 인물, 동물, 자연, 신화에 나오는 신들 까지도 모든것이 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신들을 모신 신사는 특히 천항과 관련이 있으면 신사중에서도 최고로 격이 높아 신궁이나 궁으로 불리워졌다.
이런 다양한 신들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종교 신토는 교리나 경전이라고는 없다.
신들이 너무 많고 신들의 기능도 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통일된 교리나 경전을 만들기가 어려워서 일것이다.
이러한 신토는 불교가 일본에 들어오면서 부터 종교가 되었다고 말할수 있는데, 그때부터 신토랑 불교는 사상적으로 공간적으로 공존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 본다.
두 종교가 혼합됨으로 인해서 신토의 신들이 불법을 보호한다던가 부처가 토착신의 모습으로 변화한다던가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기막힌 이야기들도 심심치않게 들어본 얘기다.
또 신사랑 절이 같은 경내에 있는 경우도 많은데, 도쿄의 아사쿠사, 교토의 청수사등 이들 유명한 사찰안에서 크고 작은 신사들을 찾아보기는 아주 쉬운일이다.
일본의 불교는 538년 백제로 부터 들어와 전개됨으로써 불교문화를 꽃 피우게 되고 백제가 망한 뒤에는 견당사를 통해 일본의 승려들이 당나라에 가서 많은 불교 사상을 배워와 더욱 더 일본의 불교가 발전을 하게 된다.
불교는 원래 있던 신토와 관계를 맺는 한편 각계층별로 서로 다른 불교 종파가 전해 졌는데,
국가 차원에서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 불교가 자리를 잡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기원을 들어 주는 미료가 유행을 했고,
서민들한테는 염불만 외어도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는 정토종을 선호하게 됐고 무사들이 정권을 잡은 수에는 좌선을 통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선종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선종의 승려들은 무사들의 참모역할을 했을만큼 영향력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한편, 기독교는 16세기 중반에 일본에 전파됐는데, 이 시대는 전국시대라 불리우는 일본의 혼란한 시기였다.
각 지역의 영주(다이묘)들은 포르투칼 사람에게 화승총, 과학기술등을 얻는 대신에 기독교 포교를 허락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일본 전역에 30-40만명 정도까지 기독교 신자가 늘어나게 된다.
특히 큐슈지역에서는 4명의 소년들과 사절단을 꾸려 1582년에 나가사키를 출발 마카오를 거쳐 1584년에 포르투칼에 도착 한뒤, 스페인에 들렀다가 로마교황까지 알현한 뒤 많은 세월을 거쳐 기독교를 배워서 일본에 돌아 오게 되는데 그때가 1590년으로 1582년 출발 당시랑은 상황이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평정하고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그가 보기에는 이러한 선교사들이,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세력에게는 위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 보다는 신앙을 우선시 하기에 도요토미 입장에서는 그들을 싫어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기독교 탄압은 더 심해지면서 각지에서 순교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큐슈의 시마바라는 곳에서는 대규모 반란도 일어나게 된다. 3만7천여명의 반란군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결국은 막부의 손에 처참히 죽고 말았다.
반란에 놀란 에도 막부는 아예,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닌 불교 신자임을 입증하는 문서를 절에서 발급받도록 강제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각 지역에 있는 절의 소속이 돼고 절은 하급 관청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절에서 그 지역사람들의 장례나 묘지 관리 가지 하게 된것이다.
이런 역할을 하게 된 불교는 점점 종교적인 성격에서 멀어지게 돼기 시작했다.
한편 시대가 흘러서 종교의 역사는 더욱 더 파란만장한 변화를 겪데 되는데,
19세기 중엽 메이지유신으로 기독교 금지를 풀고 종교 자유화를 선포하게 된것이다.
그러면서도 메이지 정부에서는 신토를 국가 공식 종교로 지정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종교 자유화가 보장 되었지만, 불교, 기독교등 종교가 신토랑 부딪히게 돼면 신토이외의 종교는 철저하게 탄압을 받게 된것이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는 천녕이 넘게 공존해 온 신토와 불교의 분리 명령도 내린다.
그러자 그동안의 불신으로 미움을 샀던 절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 사찰이나 불상등을 파괴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것이다.
오랜세월 하급 관청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불만이 쌓였던 민중들이 주도한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 모든 신사는 정부가 관리하기 시작하고 천황과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신사의 격이 달라지게 된것이다.
자연의 모든것이 신이 돼는 다양성을 가진 신토와 천황제가 하나로 연결되어 버리게 돼버린것이다.
그래서 천황은 권력의 최고 우두머리이자 종교적으로도 전국민의 숭배 대상이 되어서 살아있는 신으로 받들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국가신토 라고 한다.
패전후에 연합군 사령부가 천황에게 인간선언을 하라고 할정도였으니, 당시 일본이 신토를 어느정도 숭배하고 있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만 했다.
그렇게 하여 국가 신토가 해체 되어 국가와 신토를 잇는 끈이 끊어지게 되었다.
여기까지 지난 역사속에서의 불교, 기독교, 신토에 대해 조금 들여다 보게 됨으로써 왜 일본인들이 종교를 종교로서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졌고 또 그런 종교를 믿더라도 자기가 선뜻 그런 종교인이라고 밝히기는 껄끄러운 사회분위기도 조성 됐기 때문에 일본인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실질적으로는 적을수 밖에 없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일본의 종교에 관해 서술한 책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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