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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야기

천년이 넘도록 소고기를 전혀 먹지않았던 나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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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절

예부터 일본인은 쌀을 중심으로 한 식생활을 해옴과 동시에 사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지리적 특성 때문에 풍부한 생선과 해산물이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식용하고 있었다.

일본의 식습관변천사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이나 일본인은 쌀과 채소 생선을 주식으로 하였고 고기를 먹는 습관은 거의 없었다.

일본에서 육식을 먹는 습관이 없는 이유는 675년 일본의 제40대 천황인 덴무 텐노가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육식 금지령을 내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소, 말, 개, 닭, 원숭이 등 네발 달린 포유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육식을 하게 되면 머나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는 등 처벌이 강해졌다. 그 영향으로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소는 논밭을 경작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으로, 말은 전투에서 매우 중요한 군사용 동물로 생각하게 되었고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543년 포르투칼인을 태운 배가 유연히 다네가시마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때 일본은 처음으로 유럽인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이들을 통해 화승총과 육식을 중심으로 한 서양 요리가 전해졌지만 육식 요리는 좀처럼 보급되지 않았다.

17세기 에도시대가 되자 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네델란드이외의 유럽 국가와는 무역이 끊어지게 되고 서양 요리와의 인연도 더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서양의 압도적인 힘을 직접 본 에도 막부는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기 시작하는데, 이때에 페리 제독이 에도 막부에 대접한 요리는 대량의 와인과 두꺼운 비프스테이크, 양고기 등 일본인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요리였다. 서양의 거대한 군사력과 함께 식생활에도 강한 자극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거쳐 메이지시대가 되면서 문명개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서양문화가 점차 생활 속으로 도입되기 시작. 이와 함께 서양의 육식 요리도 함께 들어오게 된다. 또한 서양인에 비해 왜소한 일본인의 체력을 개선하기 위해 1872년 육식 금지령을 풀고 육식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당시 메이지 덴토는 소고기와 양고기 가끔은 돼지와 사슴, 토끼고기도 올리라고 명령하면서 천황이 직접 고기를 입에 대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872.1.24)

 

 

200여 년간 봉인되었던 육식 금지령이 해체되면서 서양 요리가 빠른 속도로 일본 국내에 흘러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쌀, 채소, 생선만 먹던 일반 서민들에게 육식은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 정부와 지식인들은 육식을 해야만 문명인이라고 적극적으로 장려했지만 서민들에게는 조리법이나 먹는 방법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한 저항감을 없애준 것이 규 나베라는 음식이었다. 소고기 전골 같은 것인데 조미료로 쓴 된장으로 육고기 특유의 잡냄새를 잡아주었기에 처음에는 무서워 벌벌 떨던 사람들은 그 맛에 반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가격은 당시 서양 요리의 5분의 1 정도였기에 규 나베 가게는 전국적으로 빠르게 퍼지면서 성화를 이루게 된다.

 

규나베

그 이후에 발전된 요리가 스키야끼란 요리였다. 스키야끼는 얇게 썬 고기와 함께 파, 양파, 쑥갓, 버섯, 두부 등 다양한 재료를 넣어 먹는 전골과 같은 요리다. 거기에 간장과 설탕을 이용해 간을 내고 익힌 고기를 날달걀에 찍어 먹기도 한다.

샤부샤부와 비슷한데 고기의 두께가 좀 더 두꺼운 편이다. 스키야끼는 옛날 일본 농민들이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농기구를 깨끗이 씻어 그위에 고기를 구워 먹었던 것이 계기이다. 그때 사용한 농기구의 일본어 발음인 스키에 굽다는 야끼가 합쳐지면서 스키야끼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구워 먹었으나 된장이나 간장을 사용하며 맛을 내기 시작했고 농기구 대신 냄비를 사용하면서 오늘날의 스키야끼의 모습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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